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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暴雪) / 오탁번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 김삼환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 / 김삼환 순식간에 뽑혀 나와 부르르 떠는 배추 그렇다 분수처럼 절정에서 꺾이는 것 전율은 솟구친 몸이 떨어질 때 오는 거다 증거는 충분하지, 두 쪽으로 배를 갈라 차곡차곡 쌓아 온 이력들을 흔드는 것 오로지 결기(潔己)하나로 한 번 외쳐 보는 거다 소금기가 구석구석 온 몸으로 스며들 때 누구인들 한 번쯤 이렇게 푹 젖다 보면 사나흘 생각이 깊어 돌아갈 수 없는 거다 고추 마늘 온갖 양념을 한 통속에 비벼서 덥고 춥고 맵고 짠맛을 한꺼번에 겪는 것 세상의 눈치 살피며 풀 죽을 수 있는 거다 입 안에서 씹힐 때 마지막 숨 거두며 다섯 번을 죽어서야 맛을 내는 배추처럼 몇 번을 까무러쳐야 시 한 편이 되는 거다 *출처: Daum & NAVER. *약력: 1958년 전남..

탁! / 최재경

탁! / 최재경 달랑 두 노인네 사시는 오두막에 겁도 없이 하얀 눈이 폭폭 쌓여갑니다 초저녁잠이 깬 노인네들 얼굴만 내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안노인네 가슴으로 손이 슬그머니 갑니다 밖에 누가 오는 소리 불을 껐다가 다시 켜보고는, 이 시간에 누가 올까나?, 그러다가는 마당에 나가 개운하게 오줌을 갈기다가 "별일이네! 이 나이에" 추적거리고 들어와 잠을 청해도 그냥 자려다가 손이 또 무안하여 더듬다가 “탁!” “왜이랴 이냥반이 누가 오면 어짤라구?” · · ·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고 마당에 눈은 사정없이 푹푹 쌓여가고. *출처: Daum & NAVER. *약력: 1955년 대전 출생, 2006년 『문학세계』로 등단. 눈이 폭폭 쌓여가고 푹푹 쌓여가니, 오두막살이 노인네는 잠이 달아났다. 아내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