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칠월 / 허연

믈헐다 2023. 7. 3. 02:12

칠월 / 허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을 붙이고 서 있던 여름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 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출처: 허연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약력: 1966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언론학 석사 학위, 추계예술대학교 박사 학위.

 

 

칠월은 일 년 중 가장 더운 달이니 여름의 절정이다.

장마가 끝나면 햇빛에 온갖 열매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빨갛게 익기 십상이다.

그렇게 여름이 늘 천국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화자의 칠월은

‘체념’과 ‘흑백영화’와 ‘잊은 그대’가 있다.

과거라는 빗물에 쓸려가 버린 나날들이 흘러가는 빗물 속에서 골을 파고,

문득 당신이 비치기 때문에 여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반어적 표현이리라.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포르노그라피 / 박이화  (0) 2023.07.05
소백산 은방울꽃 / 이문복  (0) 2023.07.04
건널목 / 나석중  (0) 2023.07.02
고부 / 김수열  (0) 2023.07.01
볕 좋은 날 / 이재무  (0) 202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