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꾸는 아침 / 이기철
연필 깎아 쓴다
누구에게라도 쉬이 안기는 아침 공기를
섬돌 위에 빨아 넌 흰 운동화를
손톱나물, 첫돌아이, 어린 새, 햇송아지
할미꽃 그늘에 앉아 쉬는 노랑나비를
밟으면 신발에 제 피를 묻히는 꽃잎
가지에 매달려 노는 붉은 열매 식구들을
내 무릎까지 날아온 살구꽃 꽃이파리
편지 쓰는 연인의 복숭앗빛 뺨
연필 깎아 쓴다
세상을 건너가는 열렬한 기후를
나에게 놀러 온 최초의 날씨를
*출처: 이기철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약력: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영남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연필로 쓰는 글은 쓴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정감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 연필을 새로 깎아서 쓴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가짐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
"편지 쓰는 연인의 복숭아빛 뺨"처럼 말이다.
시를 쓸 당시 팔순을 앞둔 시인의 심성이 이렇게 곱다는 것은
시인은 나이를 먹을 뿐 마음은 여전히 파릇파릇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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