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황혼 / 서정주
새우마냥 허리 오그리고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너머
골골이 뻗치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나는 없느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여뀌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봇도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 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엇비슥이 비끼어 누워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출처: 서정주 시집 『동천』, 은행나무, 2011.
*약력: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동국대학교 졸업, 1936년 동아일보 '벽' 등단, 2000년 타계.
“뉘엿뉘엿 저무는 황혼을 /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내키지는 않으나 가긴 가야 하는 화자의 심정이다.
하루가 고단했건만 잠으로 건너가기는 달콤하지만은 않다.
“내 사랑의 봇도랑물 /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 두고”
이제야 맘껏 흐르라고 내버려 둔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저무는 황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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