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에는 / 최하림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넓고 넓은 들을 돌아다니는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컨대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 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 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들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 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하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출처: 최하림 시집 『풍경 뒤의 풍경』, 문학과지성사, 2019.
*약력: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0년 작고.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에 모두 예민해지는 가을의 시간.
그것을 잘 아는 화자는 다른 것들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써도 메뚜기와 벌레와 마른풀들이 요동을 친다.
그것들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쇄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을날에는 우리의 감각까지도 예민하게 만든다.
열매 떨어지는 소리와 하루가 저무는 발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리고,
석양이 성큼성큼 땅으로 내려오는 소리까지도 들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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