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은행나무 고서古書 / 곽종희

믈헐다 2023. 9. 22. 06:04

은행나무 고서古書 / 곽종희

 

오백 년 얽힌 설화 눈으로 읽는 내내

담장 밑 수북 쌓인 편년체 은행잎들

잰걸음 길손을 맞아 고서 정리 바쁘다

 

책장을 뒤적이다 각주를 다는 바람

쓰다 만 행간 위로 무딘 붓끝 세울 때

보름달 길을 터준다

둥근 등 환히 밝혀

 

백 년도 못 살면서 아등바등 사는 사이

점자로도 읽지 못해 잠시 접은 우화羽化의 꿈

어둠 속

질라래비훨훨

노랑나비 날고 있다

 

*출처: 곽종희 시조집 외로 선 작은 돌탑, 책만드는집, 2022.

*약력: 경북 영양 출생, 2018 '나래시조' 신인상 수상, 2021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인간은 고작 백 년도 못 살면서 아등바등하지만

마을을 지키는 수백 년의 은행나무와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년의 전설을 안고 의연하다.

그것들은 신화, 전설, 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인은 유구한 세월을 산 그 은행나무들을 바라보며

"점자로도 읽지 못해 잠시 접은 우화(羽化)의 꿈"이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어둠 속 / 질라래비훨훨 / 노랑나비 날고 있다"니

번데기가 성충이 되어 하늘을 날 듯, 화자의 몸에도 날개가 돋아 훨훨 날지 않겠는가.

 

*참고

'우화(羽化)'는 번데기가 날개 있는 성충이 됨과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됨을 이르는 말이다.

'질라래비훨훨'은 어린아이에게 새가 훨훨 날듯이 팔을 흔들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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