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불을 지펴야겠다 / 박철

믈헐다 2023. 10. 15. 00:15

불을 지펴야겠다 / 박철

 

​올 가을엔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눈 내리는 밤길 달려갈 사나이처럼

따뜻하고 맞춤한 악수의 체온을-

무슨 무슨 오피스텔 몇호가 아니라

어디 어디 원룸 몇 층이 아니라

비 듣는 연립주택 지하 몇호가 아니라

저 별빛 속에 조금 더 뒤 어둠 속에

허공의 햇살 속에 불멸의 외침 속에

당신의 속삭임 속에 다시 피는 꽃잎 속에

막차의 운전수 등 뒤에 임진강변 초병의 졸음 속에

참중나무 가지 끝에 광장의 입맞춤 속에

피뢰침의 뒷주머니에 등굣길 뽑기장수의 연탄불 속에

나의 작은 책상을 하나 놓아두어야겠다

지우개똥 수북이 주변은 너저분하고

나는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어야겠다

불을 지펴야겠다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한번 해야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서설이 내리기 전 하나의 방을 마련해야겠다

*출처: 박철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 문학동네, 2009.

*약력: 1960년 서울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이다.

그렇지만 그 글이 놓인 자리에서 외로움은 사라지고,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으면, 세상의 추운 곳을 녹이는 불이 지펴지리라.

결코 나 혼자 살자고 지피는 불이 아니라 널리널리 비치는 박애의 불빛이니,

진정 가치 있는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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