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지펴야겠다 / 박철
올 가을엔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눈 내리는 밤길 달려갈 사나이처럼
따뜻하고 맞춤한 악수의 체온을-
무슨 무슨 오피스텔 몇호가 아니라
어디 어디 원룸 몇 층이 아니라
비 듣는 연립주택 지하 몇호가 아니라
저 별빛 속에 조금 더 뒤 어둠 속에
허공의 햇살 속에 불멸의 외침 속에
당신의 속삭임 속에 다시 피는 꽃잎 속에
막차의 운전수 등 뒤에 임진강변 초병의 졸음 속에
참중나무 가지 끝에 광장의 입맞춤 속에
피뢰침의 뒷주머니에 등굣길 뽑기장수의 연탄불 속에
나의 작은 책상을 하나 놓아두어야겠다
지우개똥 수북이 주변은 너저분하고
나는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어야겠다
불을 지펴야겠다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한번 해야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서설이 내리기 전 하나의 방을 마련해야겠다
*출처: 박철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 문학동네, 2009.
*약력: 1960년 서울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고 다짐하는 시인이다.
그렇지만 그 글이 놓인 자리에서 외로움은 사라지고,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으면, 세상의 추운 곳을 녹이는 불이 지펴지리라.
결코 나 혼자 살자고 지피는 불이 아니라 널리널리 비치는 박애의 불빛이니,
진정 가치 있는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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