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고지 / 윤제림
승강기 버튼을 누르면서 아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몇 층 가세요?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 할아버지 아니다
아이가 먼저 내리면서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이런 고얀 녀석" 하려는데,
"그래, 안녕" 소리가
먼저 나왔다
잘했다
저 아이가, 내 딸애한테
태기(胎氣)가 있음을 알려주러
먼 길을 온 천사인지
누가 아는가
*출처: 윤제림 시집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문학동네, 2019.
*약력: 1960년 충북 제천에서 나고 인천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눈에 봐도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는 시이다.
‘수태고지(受胎告知)’는 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할 것임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을 말하며, ‘성고(聖告)’라고도 한다.
훗날 그 아이도 똑같이 수태고지를 받을 것이다.
‘학생’에서 ‘총각’, ‘총각’에서 ‘아저씨’
또 언젠가는 그때의 아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안녕히 가세요, /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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