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수태고지 / 윤제림

믈헐다 2023. 10. 15. 22:12

수태고지 / 윤제림

 

승강기 버튼을 누르면서 아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몇 층 가세요?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 할아버지 아니다

 

아이가 먼저 내리면서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이런 고얀 녀석" 하려는데,

"그래, 안녕" 소리가

먼저 나왔다

 

​잘했다

 

저 아이가, 내 딸애한테

태기(胎氣)가 있음을 알려주러

먼 길을 온 천사인지

누가 아는가​

 

*출처: 윤제림 시집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문학동네, 2019.

*약력: 1960년 충북 제천에서 나고 인천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한눈에 봐도 재밌는 그림이 그려지는 시이다.

‘수태고지(受胎告知)’는 마리아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할 것임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알린 일을 말하며, ‘성고(聖告)’라고도 한다.

훗날 그 아이도 똑같이 수태고지를 받을 것이다.

‘학생’에서 ‘총각’, ‘총각’에서 ‘아저씨’

또 언젠가는 그때의 아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안녕히 가세요, / 할아버지!”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암동 / 박준 ​​  (0) 2023.10.18
오래된 습관 / 최규환  (1) 2023.10.17
불을 지펴야겠다 / 박철  (1) 2023.10.15
엽서 / 조인선  (0) 2023.10.12
전어 / 김창균  (1) 2023.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