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 허연

믈헐다 2022. 11. 26. 23:22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 허연

 

어차피 나는

더 나은 일을 알지 못하므로

강물이 내게 어떤 일을 하도록 내버려둔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강물이 내게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한번도 서러워하지 않은 채

강물이 하는 일을 지켜본다

 

나는 오직 강물에만 집중하고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저 천년의 행진이 서럽지 않은 건

한 번도 되돌아간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를 지나온 강물에게

내력을 묻지 않는다

모두 이미 섞인 것들이고

강변에선 묻지 않는 것만이 미덕이니까

 

강물 앞에서 나는 기억일 뿐이다

부정확한 시계공이 가끔 있었고

뜻하지 않은 재회가 있기도 하지만

강물의 행진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계속된다

 

강물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한다는 것

한번도 서럽지 않다는 것

내가 기억이 된다는 것

 

*출처: 허연 시선집, 천국은 있다, 아침달 2021.

*약력: 1966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석사 학위, 추계예술대학교 박사 학위.

 

(강원도 영월 서강 / 한반도를 닮은 강)

 

강을 소재로 한 시는 도도히 흐르는 역사와 굽이치는 삶 따위가 대부분이다.

이 시도 마찬가지지만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는 시제를 눈여겨볼만하다.

여기서 말한 강물은 흐르는 방향만 잡았을 뿐 아무런 기대 없이도 저절로 흘러간다.

우리도 때때로 저절로 흘러간 그때 그 시간이 좋았다며 회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에서 말하는 '시계공'은 시를 수리하는 '시계공(時計工)'이 아닌 시(詩를) 쓰는 '시계공(詩契工)'이다.

즉 '시계공(詩契工)'은 수사법인 제유(提喩)로 시인이 조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강물의 행진'은 시인에겐 어떤 작용이 미치더라도 서럽지 않다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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