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 정호승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은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도 있었다고
*출처: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2022.
*약력: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시제에서 말하는 '뒷모습'이란 뒤에서 본 사람의 모습인 '뒤태'라기보다는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나 인생의 뒤안길을 말한다.
누구나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회한만 서리기 마련이다.
아름답게 살아왔노라고 자부한 시인도 어느 날 뒤돌아보니 낙서투성이 담벼락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와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어
뒷모습이 아름다운 때도 있었다고 노래한다,
과연 우리의 뒷모습은 어떨까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참고
'금당실 마을'은 경북 예천군에 있는 전통 마을로 돌담이 멋스럽기 그지없다.
'고샅길'은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이나 골목 사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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