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마는 여자 / 장만호
눈 내리는 수유 중앙 시장
가게마다 흰 김이 피어오르고
묽은 죽을 마시다 보았지,
김밥을 말다가
문득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끈적이는 생애의 죽간竹簡과
그 위에 찍힌 밥알 같은 방점들을,
저렇게 작은 뗏목이 싣고 나르는 어떤 가계家系를
한 모금 죽을 마시며 보았지
시큼한 단무지며 시금치며
색색의 야채들을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고
붓꽃 같은 손이 열릴 때마다 필사되는
검은 두루마리,
이제는 하나가 된
그 단단한 밥알 속에서 피어오르는
삼색의 꽃들을
*출처: 장만호 시집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약력: 1970년 전북 무주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정겨운 모습에서
문득 어머니와 아내의 생애를 떠오르게 하는 시이다.
"시큼한 단무지며 시금치며 / 색색의 야채들을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고",
삼색의 꽃을 피우는 붓꽃 같은 여인의 손놀림이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헛헛한 속을 부드럽게 채워주는 죽 같고 진한 그리움의 시이지 않은가.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를 위하여 1 / 윤효 (0) | 2023.05.12 |
---|---|
ㄹ / 정록성 (0) | 2023.05.10 |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0) | 2023.05.09 |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0) | 2023.05.08 |
택시 / 박지웅 (0) | 2023.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