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출처: 이상국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 2005.
*약력: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강원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세상의 모진 바람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시이다.
시의 표현처럼 우리 세대는 그렇게 살아왔다.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한참 동안 가로등 불빛 아래서 서성이다가
집으로 들어설 때는 고개를 바짝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의 아버지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저녁이 아름다운 건 가족이 밥상 앞에 앉아 서로를 보듬는 소소한 행복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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