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김밥 마는 여자 / 장만호

믈헐다 2023. 5. 10. 05:13

김밥 마는 여자 / 장만호

 

눈 내리는 수유 중앙 시장

가게마다 흰 김이 피어오르고

묽은 죽을 마시다 보았지,

김밥을 말다가

문득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끈적이는 생애의 죽간竹簡과

그 위에 찍힌 밥알 같은 방점들을,

저렇게 작은 뗏목이 싣고 나르는 어떤 가계家系를

한 모금 죽을 마시며 보았지

시큼한 단무지며 시금치며

색색의 야채들을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고

붓꽃 같은 손이 열릴 때마다 필사되는

검은 두루마리,

이제는 하나가 된

그 단단한 밥알 속에서 피어오르는

삼색의 꽃들을

 

*출처: 장만호 시집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약력: 1970년 전북 무주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정겨운 모습에서

문득 어머니와 아내의 생애를 떠오르게 하는 시이다.

"시큼한 단무지며 시금치며 / 색색의 야채들을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고",

삼색의 꽃을 피우는 붓꽃 같은 여인의 손놀림이 아름답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헛헛한 속을 부드럽게 채워주는 죽 같고 진한 그리움의 시이지 않은가.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를 위하여 1 / 윤효  (0) 2023.05.12
ㄹ / 정록성  (0) 2023.05.10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0) 2023.05.09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 이상국  (0) 2023.05.08
택시 / 박지웅  (0) 2023.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