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의상 / 안은숙
옷걸이에 걸린
상의(上衣) 하나, 설레고 있다
공중을 아랫도리로 삼고
주머니마다 어지럼증이 가득해
어느 바람에나 잘 흔들린다
단추가 없는 상의는
실이 꿰어진 바람의 눈이고
흔들리는 레이스는
피지 않은 바람의 깃이다
반나절은 하마터면
날려갈 뻔한 외출이었다
*출처: 안은숙 시집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달을쏘다, 2022.
*약력: 1965년 서울 출생, 교육학 석사, 2015년 〈실천문학〉 등단.
'바람'이라는 보통 명사가 뜻하는 바가 다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독 더 눈길이 간다.
공기의 움직임, 이성과의 관계, 사회적 분위기, 들뜬 기분과 바라는 마음 따위를 말함이다.
보통의 주부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바쁜 집안일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가 있다.
화자는 언뜻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레이스가 눈에 들어와 잠시 상상의 나래에 빠진다.
"어느 바람에나 잘 흔들린다" 했지만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옷걸이를 벗어날 수 없는 주부는
레이스가 달린 옷의 한때를 추억하거나 외출하는 상상만으로도 잠시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하마터면",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평범한 주부의 일탈을 노래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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