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비우거나 버리거나 / 정병근

믈헐다 2023. 6. 2. 02:51

비우거나 버리거나 / 정병근

 

마음을 비우니까

온 바깥이 내 것이라고

나 이렇게 부자라서 행복하다고

전화하는 친구가 있다

 

한 뙈기 밭이나 일구며 살아야지

빈자의 행복 비슷한 말을 하다가

늦었다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

오로지 무궁한 이 강령이

내게 이르기까지는 멀다

인천 앞바다의 사이다처럼

나는 목이 마르고

 

버리고 비워서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고함을 버럭버럭 견디다가

'니 누고?'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출처: 정병근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 여우난골, 2023.

*약력: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학 국문학과 졸업.

 

 

우리는 흔히 마음을 비우거나 버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시인의 말이다.

마음을 비우니까 온 세상이 내 것이라는 사람도 부자라서 행복하다고 하고,

뙈기밭이나 일구고 살아야겠다는 사람도 늦었다는 핑계로 택시를 타고 다니고,

심지어 버리고 비우다 보니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니 말이다.

결국 시인이 던진 화두는 무엇을 버리고 비워야 할 지 깊이 생각하자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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