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원추리와 능소화의 힘으로 / 신달자

믈헐다 2023. 6. 1. 05:23

원추리와 능소화의 힘으로 / 신달자

 

무릎이 아픈데도 조금은 절룩거리면서

50분을 걸었다

무슨 힘으로?

추억의 힘으로

 

원추리가 아침노을을 이야기하고

능소화가 여름 이야기를 줄줄이 타고 오르며

저녁노을의 극점에서

숨을 몰아쉬는

원추리 한 송이 손에 쥐었는데 가슴에서 피어나고

능소화 주황빛 손길은

덮은 생의 그늘을 찬란하게 살아 나르게 하고

빛으로 솟구쳐 오르게 하고

마흔 속으로 젊은 혈기 속으로

나른하게 완결의 미소를 날리며 걷고 있네

딱 50분이 아니라 그 이상

추억이라는 한 사람이

하늘의 힘으로 뜨겁게 손잡아 주고......

 

*출처: 신달자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민음사, 2023.

*약력: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어떤 추억이었기에 아픈 무릎을 감내하면서까지 무려 50분을 걷게 하였을까.

능소화와 원추리가 품고 있는 시인의 마흔 시절의 추억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바로 그런 것이 시이지 않겠는가.

읽는 이로 하여금 화자의 추억을 마음대로 상상하게 하고,

언뜻 읽는 사람 자신의 슬픔과 기쁨까지도 돌이키게 하니 말이다.

모든 아픔도 추억의 힘으로 버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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