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외출 / 허향숙

믈헐다 2023. 6. 5. 01:46

외출 / 허향숙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 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 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출처: 허향숙 시집 그리움의 총량, 천년의시작, 2021.

*약력: 1965년 충남 당진 출생, 2018 시작으로 작품 활동 시작,  백강문학회 회장.

 

(은평구 한옥마을)

시부모와 남편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험한 말들을 삼키고 외출을 시도한다.

기껏 찾아간 곳이 서울 은평구 뉴타운에 있는 낮은 산, "이말산 산자락 근방 카페"이다.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 꼭대기의 빈 둥지를 보다가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가니, 여느 주부의 일상이 그려진다.

"귀머거리 삼 년이요 벙어리 삼 년"이라는 속담이 있다.

여자는 시집가서 남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집살이는 말 그대로 시집살인가 보다.

 

*참고

'단도리dandori'는 일본어이다.

같은 값이면 순우리말인 '채비'나 한자어인 '단속團束'으로 하지 않은 까닭이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하루 종일을 뜻하는 '해종일'과 나무의 꼭대기 줄기를 뜻하는 '우듬지'라는 말은 얼마나 예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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