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믈헐다 2023. 6. 6. 05:32

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은 아닐까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 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출처: 복효근 시집 따듯한 외면 , 실천문학사, 2013.

*약력: 1962년 전라북도 남원 출생,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가는 듯 마는 듯 아주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가 자못 진지할 뿐만 아니라

그리움을 향한 몸짓처럼 그 모습이 지극도 하다.

생식을 하기 위하여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성적 관계를 맺는

'흘레'의 자세를 이렇게 고귀하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달팽이 점액질의 속살이 갑자기 환하고 눈부시게 와 닿는다.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서로를 덮어줄 수 있는 달팽이의 신혼 방은

느려터진 달팽이걸음처럼 몇백 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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