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준다는 것 /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 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이었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은 아닐까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 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출처: 복효근 시집 『따듯한 외면 』, 실천문학사, 2013.
*약력: 1962년 전라북도 남원 출생,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가는 듯 마는 듯 아주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가 자못 진지할 뿐만 아니라
그리움을 향한 몸짓처럼 그 모습이 지극도 하다.
생식을 하기 위하여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성적 관계를 맺는
'흘레'의 자세를 이렇게 고귀하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달팽이 점액질의 속살이 갑자기 환하고 눈부시게 와 닿는다.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서로를 덮어줄 수 있는 달팽이의 신혼 방은
느려터진 달팽이걸음처럼 몇백 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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