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 / 나석중
초면에 말 붙여오는
당당한 사랑은 들키고 싶은 속성이 있는 것인지
겹겹으로 무장한 밤톨 같은 노인이 획 돌아보며
묻지도 않았는데 당신 나이 올해 96세라 하시네
나 당신 뒤를 걸어가다가 순간 황당했으나
이내 웃으며 어디 가시냐, 고 웃으며 물었더니
애인 만나러 간다며 밤꽃을 피웠네
애인은 연세가 얼마신지 또 물으니 90이라 하시며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듯
눈 치켜뜨고 기세도 당당히 웃는 낯빛이 붉었네
일찍 사랑을 포기한 사내는 사내도 아니라고 난
느슨 허리띠 졸라맸네
*출처: 나석중 시집 『저녁이 슬그머니』, 북인, 2021.
*약력: 1938년 전북 김제 출생,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 활동 시작.
이 시를 감상하니 문득 '밤꽃'의 다른 말인 '밤느정이' 라는 예쁜 우리말이 떠오른다.
'밤늦'이라고도 하는데, '느정이'와 '늦'이라는 어감이 왠지 이 시와 어울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꽃들은 여성의 꽃인데 반하여, 밤꽃은 유일하게 남성의 꽃으로
한 그루에 수꽃과 암꽃이 함께 피어난다.
여우꼬리처럼 부승부승하고 길게 아래로 늘어져 달리는 것은 수꽃이고,
암꽃은 이 수꽃 꽃차례 바로 밑에 숨어서 세 개씩 달리는데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독특한 향을 품어내는 것은 수꽃이고, 암꽃은 향기가 없다는 것이다.
밤꽃을 향기라고 하지 않고 밤꽃 냄새라고 하는 것은 남성의 거시기 냄새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총각과 달리( 아니까) 처녀는 밤꽃 냄새에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고 하니(모르니까),
시 속의 아흔여섯의 할아버지와 아흔의 할머니는 밤꽃처럼 사시는 것 같다.
일찍 사랑을 포기한 사내들이여, 힘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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