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오타 / 하린

믈헐다 2023. 6. 25. 05:58

오타 / 하린

 

시인을 치다가 시신이라고 쳐 버렸다

사람을 사랑으로 치는 건 괜찮은 일

의도적인 오타 같아 시 쓰는 일이 무덤 속이란 생각

내가 살해하고 싶은 시인은 누구인가?

무덤의 비문으로 새기고 싶은 시는 어떤 문제작인가?

내 시는 분명 죽은 시이거나 앞으로 죽을 시일 테니

기막힌 은유나 기발한 상징 따윈 관 속에 넣지 말아야 한다

어떤 날은 까마귀 한 마리가 아침의 은밀한 시로 짖어 대고

언젠가는 까치 한 마리가 밤의 음흉한 구절을 물고 간다

독주에 취해 천변에 오줌을 갈긴다

내 안을 빠져나온 곰팡이 같은 것들이 구정물과 섞인다

가끔은 시체가 오히려 시인답다고 여기는 순간들이 있다

한밤중 시 잡지를 펼치면 왈칵, 울컥 시신들이 쏟아진다

 

*출처: 하린 시집 서민생존헌장, 천년의시작, 2015.

*약력: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 박사 학위, 2008 시인세계 신인상 수상을 통해 등단.

 

(노루오줌꽃)


시적 화자는 시를 아주 하찮게 취급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행간에 담긴 시에 대한 해석이 참으로 심오하다.

화자는 시인을 시신으로 친 것은 의도적인 오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시 쓰는 일이 무덤 속이란 생각까지 하게 된다.

화자가 살해하고 싶은 시인과 무덤의 비문으로 새기고 싶은 시는 어떤 문제작일까.

시란 시인의 전부이니 온몸으로 시를 쓰라고 했다.

목숨을 걸고 뱉어 내었으니 시인의 시신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참고

'천변川邊'은 냇물의 주변을 말하는 한자어이고, 순수한 우리말은 '냇가'를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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