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능소화 / 이원규

믈헐다 2023. 7. 27. 23:44

능소화 /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출처: 이원규 시집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약력: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고등학교 1학년 자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계명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후 휴학, 1984년 《월간문학》에 시 〈유배지의 풀꽃〉으로 등단.

'능소화'는 하늘 높이 오른다 하여 능소(凌霄),

즉 '하늘을 능멸하다'의 의미로 '하늘을 이기는 꽃'이라 한단다.

임금의 하룻밤 사랑을 받은 궁년가 임금을 기다리다 지쳐 죽어서 된 꽃이라는 전설도 있다.

능소화 꽃가루가 눈을 멀게 한다는 속설이 생긴 것은 그러한 전설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가, 시인은 이 꽃을 사랑을 그리워하는 꽃으로 노래한다.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 두 눈이 멀어버리는 /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꽃가루에 눈이 먼 것이 아니고 사랑에 눈이 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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