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출처: 이원규 시집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5.
*약력: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고등학교 1학년 자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계명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후 휴학, 1984년 《월간문학》에 시 〈유배지의 풀꽃〉으로 등단.
'능소화'는 하늘 높이 오른다 하여 능소(凌霄),
즉 '하늘을 능멸하다'의 의미로 '하늘을 이기는 꽃'이라 한단다.
임금의 하룻밤 사랑을 받은 궁년가 임금을 기다리다 지쳐 죽어서 된 꽃이라는 전설도 있다.
능소화 꽃가루가 눈을 멀게 한다는 속설이 생긴 것은 그러한 전설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가, 시인은 이 꽃을 사랑을 그리워하는 꽃으로 노래한다.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 두 눈이 멀어버리는 /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꽃가루에 눈이 먼 것이 아니고 사랑에 눈이 먼 것이리라.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야 식당 / 박소란 (0) | 2023.07.30 |
---|---|
수묵의 사랑 / 손택수 (1) | 2023.07.29 |
번짐의 속성 / 김문배 (0) | 2023.07.27 |
시의 시대 / 이창기 (0) | 2023.07.26 |
동자꽃 / 김승기 (0) | 202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