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시대 / 이창기
라면이 끓는 사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낸다. 무정란이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다. 누군가 그를 낳은 것이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그가 누굴 닮았건, 그가 누구이건 인 마이 마인드, 인 마이 하트, 인 마이 소울을 외치면 곧장 가격표가 붙고 유통된다. 소비는 그의 약속된 미래다. 그는 완전한 무엇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누군가를 애끓게 사랑했던 기억도 없다. 그런데 까보면 노른자도 있다. 진짜 같다.
*출처: 이창기 시집 『착한 애인은 없다네』, 창비, 2014.
*약력: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 산림자원학과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8년 향년 51세로 타계.
*참고: 전대협, 한총련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라면 시 ‘바보 과대표’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바보 과대표’의 저자 홍치산의 본명이 바로 이창기이다.
인터넷상에 소위 ‘좋은 글’ 혹은 ‘멋진 표현’들이
시로 둔갑을 하여 짝퉁 시가 되는 “시의 시대”이다.
시가 좋은 글이 되기도 하고 멋진 표현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좋은 글과 멋진 표현 자체가 곧바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짝퉁 시들을 ‘무정란’으로 비유하였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는 무정란은
“까보면 노른자도 있”고 “진짜 같”지만,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태어났기에 결코 병아리가 될 수가 없다.
무릇 영혼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짝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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