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수묵의 사랑 / 손택수

믈헐다 2023. 7. 29. 00:06

수묵의 사랑 / 손택수

 

수묵은 번진다

너와 나를 이으며,

누군들 수묵의 생을 살고 싶지 않을까만

번짐에는 망설임이 있다

주저함이 있다

네가 곧 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경계를 넘어가면서도 수묵은

숫저운 성격, 물과 몸을 섞던

첫 마음 그대로 저를 풀어헤치긴 하였으나

이대로 굳어질 순 없지

설렘을 잃어버릴 순 없지

부끄러움을 잃지 않고 희부여니 가릴 줄 아는,

그로부터 아득함이 생겼다면 어떨까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빛깔,

한 몸이 되어서도 까마득

먹 향을 품은 그대로 술렁이고 있는

수묵은 번진다 더듬

더듬 몇백 년째 네게로

가고 있는 중이다

 

*출처: 손택수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창비, 2014.

*약력: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서양의 수채화가 화려한 색상이라면, 동양의 수묵화는 먹의 짙고 옅음뿐이다.

시인은 바로 이 수묵화를 사랑의 표현 방식으로 표현한다.

수채화는 화폭 가득 여백이 없이 온갖 색상이 빛나니 불같이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이다.

반면에 수묵화는 먹물의 진하고 옅음에 따라 검기도 하고 회색빛이 나기도 하며,

여백은 완전히 흰색으로 은은히 다가가는 부드러운 사랑이다.

그러니 “수묵의 사랑”은 “더듬 / 더듬 몇백 년째 네게로 /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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