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라는 말 / 나희덕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고도 할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나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물에 영영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볕에 널어 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바위,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물에 잠긴 여 주변을 낮게 맴돌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 여, 라는 소리가 들렸다
*출처: 나희덕 시집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
*약력: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여’는 순우리말로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를 말함이다.
그렇게 숨은바위가 돌연 수면 위로 나타나 몸을 말리는 동안
‘여’ 주변을 맴돌던 새들에게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여’ 같은 존재가 많다.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 항상 암초처럼 도사리고 있다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될 때 드러나는 경우처럼 말이다.
한편 성경의 말씀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그것을 실천하는 분들도 '여' 같은 존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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