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자존심 / 김이듬

믈헐다 2023. 9. 9. 00:14

자존심 / 김이듬

 

차를 얻어 탔다

나는 뒤에서 논다

 

신호대기에 걸렸다

한꺼번에 여름이 갔다

 

대장간에 칼이 논다

이때 ‘논다’의 말뜻은 ‘귀하다’라고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말한다

 

신나게

내 안의 앙상한 신들이 튀어나올 정도

노는 년은 아니어도

 

사랑받지 못하여

끝나는 계절은 없다

 

*출처: 김이듬 시집 표류하는 흑발, 민음사, 2017.

*약력: 경남 진주 출생, 부산 성장, 부산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수선화의 꽃말: 자기애, 자아도취, 자존심 등)


좀 특이한 시다.

핵심은 ‘놀다’라는 동사와 형용사이다.

동사 ‘놀다’는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낸다’는 뜻이고,

형용사 ‘놀다’는 ‘드물어서 구하기 어렵다’의 뜻이니 '귀하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화자는 시간이라는 차를 얻어 타, 차 뒤에서 노는 동안에 신호대기에 걸렸다.

잠깐인 줄 알았는데 찬란하고 귀한 청춘의 시간을 노느라고 여름이 다 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여름인 청춘만이 자존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가고 앙상한 겨울이 와도 우리 인생은 귀하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하여 / 끝나는 계절이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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