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 김이듬
차를 얻어 탔다
나는 뒤에서 논다
신호대기에 걸렸다
한꺼번에 여름이 갔다
대장간에 칼이 논다
이때 ‘논다’의 말뜻은 ‘귀하다’라고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말한다
신나게
내 안의 앙상한 신들이 튀어나올 정도
노는 년은 아니어도
사랑받지 못하여
끝나는 계절은 없다
*출처: 김이듬 시집 『표류하는 흑발』, 민음사, 2017.
*약력: 경남 진주 출생, 부산 성장, 부산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좀 특이한 시다.
핵심은 ‘놀다’라는 동사와 형용사이다.
동사 ‘놀다’는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낸다’는 뜻이고,
형용사 ‘놀다’는 ‘드물어서 구하기 어렵다’의 뜻이니 '귀하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화자는 시간이라는 차를 얻어 타, 차 뒤에서 노는 동안에 신호대기에 걸렸다.
잠깐인 줄 알았는데 찬란하고 귀한 청춘의 시간을 노느라고 여름이 다 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여름인 청춘만이 자존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가고 앙상한 겨울이 와도 우리 인생은 귀하기 때문이다.
“사랑받지 못하여 / 끝나는 계절이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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