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주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출처: 이어령 외, 김선경 엮음,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메이븐, 2019.
*약력: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제29대 문화부 장관, 2022년 향년 88세로 타계.
우리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실상 따지고 보면 사소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없다면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힘들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조금 더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사소한 것이 바로 오늘의 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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