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믈헐다 2023. 9. 14. 23:41

정말 그럴 때가 /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주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출처: 이어령 외, 김선경 엮음,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메이븐, 2019.

*약력: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29대 문화부 장관, 2022년 향년 88세로 타계.

 

 

우리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실상 따지고 보면 사소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없다면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힘들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조금 더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사소한 것이 바로 오늘의 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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