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들깻잎을 묶으며 / 유홍준

믈헐다 2023. 9. 28. 05:43

들깻잎을 묶으며 / 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 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지나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

 

*출처: 유홍준 시집 저녁의 슬하, 창비, 2011.

*약력: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시와반시로 등단.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추석날 오후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들깻잎을 따면서 건네는 농이다.

푸른 들깻잎이 돈다발이 되는 꿈은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우내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는 생각만 하여도 군침이 돈다.

올 추석은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함박웃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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