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엎드림 / 지연

믈헐다 2023. 9. 30. 05:52

엎드림 / 지연

 

비 그치고

 

새 소리는 실 한 줄

꽃잎이 열리는 소리는 실 네 줄

 

이쪽에서 저쪽으로

소리 매듭을 만들며 날아간다

 

바람이 솔잎 살갗으로 건너올 때

나는 몇 줄로 이 세상에 수를 놓고 있나

 

아무 색도 없이

방범창에 방울방울

그믐 숨소리로 흔들린다

 

실패에 감긴 실의 후회는 아무것도 아니리

살아 있는 순간은 아름다움을 내 귀에 꽂은 날이니

 

구름 솜에 꽂힌 녹슨 바늘이어도 좋다

오늘은 추리닝을 입고 물방울을 바라볼 일

 

*출처: 지연 시집 내일은 어떻게 생겼을까, 실천문학사, 2022.

*약력: 1971년 전북 임실 출생, 2013 시산맥 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구름 솜에 꽂힌 녹슨 바늘이어도 좋다”니

“살아 있는 순간은 아름다움을 내 귀에 꽂은 날”처럼 귀가 솔깃해진다.

고도의 은유로 시인의 심상을 나타낸 시라

설핏 감상하다가는 시제인 ‘엎드림’의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낮게 엎드리지 않고는 자연의 소리, 시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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