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깻잎을 묶으며 / 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 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지나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
*출처: 유홍준 시집 『저녁의 슬하』, 창비, 2011.
*약력: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추석날 오후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들깻잎을 따면서 건네는 농이다.
푸른 들깻잎이 돈다발이 되는 꿈은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우내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는 생각만 하여도 군침이 돈다.
올 추석은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함박웃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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