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이유 /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출처: 이원규 시집 『옛 애인의 집』, 솔, 2011.
*약력: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고등학교 1학년 자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계명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후 휴학, 1984년 《월간문학》에 시 〈유배지의 풀꽃〉으로 등단.
가을 나무들이 앙상하기 전 온몸에 불을 붙이는 것을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라고 시인은 보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라며,
“사랑도 그와 같아서 /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얼어붙은 마음을 서로 안으며 끝없이 불태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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