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단풍의 이유 / 이원규

믈헐다 2023. 10. 7. 03:48

단풍의 이유 /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출처: 이원규 시집 옛 애인의 집, , 2011.

*약력: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고등학교 1학년 자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계명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후 휴학, 1984 월간문학에 시 유배지의 풀꽃으로 등단.

 

(주왕산)

 

가을 나무들이 앙상하기 전 온몸에 불을 붙이는 것을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라고 시인은 보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라며,

“사랑도 그와 같아서 /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얼어붙은 마음을 서로 안으며 끝없이 불태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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