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먹는다 / 허향숙
꼭두새벽부터 식탁에 앉아 문장을 먹는다
어떤 문장은 국수처럼 후루룩 단숨에 들이켜고
어떤 문장은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곱씹고
또 어떤 문장은 질긴 갈빗살 뜯듯 물어뜯는다
어떤 문장은 비위에 거슬려 게워 내고
어떤 문장은 너무 맵거나 짜 눈살 찌푸리고
또 어떤 문장은 더 깊이 발효시키기 위해 저장한다
음식처럼 양념을 많이 친 문장은
소화가 안 되고 머릿속도 더부룩해진다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을 먹고 난 날은
내 영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출처: 허향숙 시집 『그리움의 총량』, 천년의시작, 2021.
*약력: 1965년 충남 당진 출생, 2018년 『시작』으로 작품 활동 시작, 現 백강문학회 회장.
시인에게는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리움을 시로 표현하는 것을
국수처럼, 오징어처럼, 갈빗살 뜯듯 “문장을 먹는다”로 비유하고 있다.
“양념을 많이 친 문장은 / 소화가 안 되고 머릿속도 더부룩해”지지만,
“삼색나물 같은 슴슴한 문장”은 얼마나 맛깔스럽겠는가.
시인이 빚어내는 문장에 빠져들다 보면 영혼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지리라.
*참고
‘슴슴하다’는 ‘음식 맛이 조금 싱겁다’의 뜻인 ‘심심하다’의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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