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갱년기 / 안현미

믈헐다 2023. 4. 25. 20:56

갱년기 /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출처: 안현미 시집 깊은 일, 아시아, 2020.

*약력: 1972년 강원 태백 출생, 서울산업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갱년기는 인체가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마치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흔히 여성에게만 찾아오는 것 같지만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의 순리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서글픈 일이지만 따를 수밖에 없다.

순리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평등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시인도 그 흔한 국숫집에서 삶을 반추하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내려놓는다.

자연의 순리에 정중히 무릎 꿇는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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