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오는 사람 / 이잠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눈물로 쏟으려 할 때
더듬더듬 온기로 뎁혀 주는 사랑
*출처: 이잠 시집 『늦게 오는 사람』, 파란, 2023.
*약력: 1969년 충남 홍성 출생(女), 1995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한자어인 '촉(燭)'과 순우리말인 '초'는 밝기를 표시하는 단위로,
오 촉이면 촛불 다섯 개의 밝기니 상당히 어두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밝고 어두움이 아니라 늦게 찾아온다는 시간성을 말하는 것이다.
화자는 뜨거워서 마음이 탈 것 같은 사랑보다 훈훈하게 덥혀 주는 사랑을 바라고 있다.
늦게 찾아오는 사람이든 늦게 찾아오는 사랑이든 서로 어리숙한 사람끼리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사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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