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출처: 안현미 시집 『깊은 일』, 아시아, 2020.
*약력: 1972년 강원 태백 출생, 서울산업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갱년기는 인체가 성숙기에서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마치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흔히 여성에게만 찾아오는 것 같지만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의 순리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서글픈 일이지만 따를 수밖에 없다.
순리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평등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시인도 그 흔한 국숫집에서 삶을 반추하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내려놓는다.
자연의 순리에 정중히 무릎 꿇는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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