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로 찍는 쉼표 / 이은규
먼 이야기
어느 왕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
왕은 그들에게 꽃씨를 나눠주며
가장 잘 간직한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했지
간직이라는 말에 방점을
첫째 아들은 바람 한 줄기 없는 금고 속에 꼭꼭
숨겨두었고
둘째 아들은 꽃씨를 팔아 더 귀한 꽃씨를 샀다
셋째 아들은 꽃씨에 오래 귀를 대고 있다 심고
가꿨다는 이야기
지금 꽃씨는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저 허공 속에 있다고 답했다는 셋째 왕자
바람이 간직하고 있다는 말
꿈에 사막을 걷다
쉼표 모양으로 끝이 살짝 삐친 꽃씨를 심었다
*출처: 이은규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2012.
*약력: 1978년 서울 출생(女),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석사학위,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시인은 꿈속에서 세 명의 왕자에게 각각 꽃씨 하나씩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세 명의 왕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간직했다.
첫째 아들은 유지와 계승을 중시하는 구시대적 방식이라면
둘째 아들은 경제 논리를 따르는 근대적 방식이다.
셋째 아들은 귀를 기울여 꽃씨의 마음을 듣고 그 물음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셋째 아들의 방식이야말로 진정 시인들이 꿈꾸는 방식이다.
오늘도 시인은 "쉼표 모양으로 끝이 살짝 삐친 꽃씨를 심을 것"이리라.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 / 황인숙 (0) | 2023.05.01 |
---|---|
커피 기도 / 이상국 (0) | 2023.04.30 |
반대말 / 하기정 (0) | 2023.04.28 |
늦게 오는 사람 / 이잠 (0) | 2023.04.27 |
갱년기 / 안현미 (0) | 2023.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