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비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이인성의 소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1995.
*출처: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2003.
*약력: 1958년 서울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우리는 날 선 말에 찔리기도 하고 뜨거운 말에 데기도 한다.
때론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때도 있다.
그러나 말은 빠르고 마음은 느리기 때문에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 말은 사라진다.
만약 마음과 말이 한판 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아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기 때문에 말이 이기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어쩌다 마음이 이길 때도 있을 것이다.
고마운 말들이 살며시 다가와 손을 내밀거나 살포시 어루만져 주니 말이다.
그런 말들을 강줄기처럼 유유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마음도 깊고 넓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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