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꽃씨로 찍는 쉼표 / 이은규

믈헐다 2023. 4. 28. 23:08

꽃씨로 찍는 쉼표 / 이은규

 

먼 이야기

어느 왕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

왕은 그들에게 꽃씨를 나눠주며

가장 잘 간직한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했지

간직이라는 말에 방점을

 

첫째 아들은 바람 한 줄기 없는 금고 속에 꼭꼭

숨겨두었고

 

둘째 아들은 꽃씨를 팔아 더 귀한 꽃씨를 샀다

 

셋째 아들은 꽃씨에 오래 귀를 대고 있다 심고

가꿨다는 이야기

 

지금 꽃씨는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저 허공 속에 있다고 답했다는 셋째 왕자

바람이 간직하고 있다는 말

 

꿈에 사막을 걷다

쉼표 모양으로 끝이 살짝 삐친 꽃씨를 심었다

 

*출처: 이은규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2012.

*약력: 1978년 서울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석사학위,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

 

 

시인은 꿈속에서 세 명의 왕자에게 각각 꽃씨 하나씩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세 명의 왕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간직했다.

첫째 아들은 유지와 계승을 중시하는 구시대적 방식이라면

둘째 아들은 경제 논리를 따르는 근대적 방식이다.

셋째 아들은 귀를 기울여 꽃씨의 마음을 듣고 그 물음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셋째 아들의 방식이야말로 진정 시인들이 꿈꾸는 방식이다.

오늘도 시인은 "쉼표 모양으로 끝이 살짝 삐친 꽃씨를 심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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