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꽁치와 시 / 박기섭

믈헐다 2023. 5. 1. 22:56

꽁치와 시 / 박기섭

 

포장집 낡은 석쇠를 발갛게 달구어 놓고

마른 비린내 속에 앙상히 발기는 잔뼈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낱낱이 발기는 잔뼈

 

- 가령 꽃이 피기 전 짧은 한때의 침묵을

- 혹은 외롭고 춥고 고요한 불의 극점을

- 무수한 압정에 박혀 출렁거리는 비애를

 

갓 딴 소주병을 정수리에 들이부어도

미망의 유리잔 속에 말갛게 고이는 주정(酒精)

일테면 시란 또 그런 것, 쓸쓸히 고이는 주정(酒精)

 

*출처: 박기섭 시조집 비단 헝겊, 태학사, 2001.

*약력: 1954년 대구 달성 출생, 1980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꽁치는 반찬이나 술안주일 뿐이니 별생각 없이 살을 발라 맛있게 먹으면 된다.

그러나 시인은 "낱낱이 발기는 잔뼈"에서 꽁치의 슬픔과 서러움을 건져내기도 하고,

말갛고 쓸쓸히 고이는 주정이 역겹다 할지라도 "갓 딴 소주병을 정수리에 들이붓기도" 하는 것이다.

"미망의 유리잔 속에 말갛게 고이는 주정" 한 방울을 얻기 위해서는

무릇 시인은 그래야 하는 것이고 시는 그러하니 말이다.

 

*참고

'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거나 그런 상태를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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