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먹습니다 / 윤이산
또록또록 야무지게도 영근 것을 삶아놓으니
해토解土처럼 팍신해, 촉감으로 먹습니다
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듯
내 몸과 맞대어 보고 비교 분석하며 먹습니다
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
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하며 먹습니다
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
땅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
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가며 먹습니다
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
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옹심이 속에 깡다구가 들었다는 건
반죽해 본 손들은 다 알겠지요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는 그 일념만으로
안데스 산맥에서 이 식탁까지 달려왔을 감자의
줄기를 당기고 당기고 끝까지 당겨보면
열세 남매의 골병든 바우 엄마, 내 탯줄을 만날 것도 같아
보라 감자꽃이 슬퍼 보인 건 그 때문이었구나,
쓸쓸에 간 맞추느라 타박타박 떨어지는
눈물을 먹습니다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 감자꽃의 꽃말
*출처: 윤이산 시집 『물소리를 쬐다』, 실천문학상, 2020.
*약력: 1961년 경북 경주 출생, 경주 문예대학,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삶은 감자를 먹으면서 온갖 세계로 빠져드는 이가 시인이 아니면 누가 또 있을까.
호미에 쪼일 때마다 나를 쫀 그 호미에 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슬픈 노래와 함께
라마르크가 주장한 '용불용설'의 진화론까지 들먹이니 말이다.
또한 옹심이 속에 들어 있는 깡다구의 아련한 추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여러 자식을 낳아 키우느라 골병든 어머니를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화자는 감자를 먹는 것이 아니라 감자 꽃이 왜 슬픈 보랏빛인지 미처 몰랐다며,
"오직 당신만 따르겠다"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힘든 삶을 살아온 바우 엄마가 흘린 눈물을 먹는 것이리라.
*참고
'해토解土'는 얼었던 땅이 녹음을 뜻하는 한자어이며, 순우리말은 '땅풀림'이다.
'용불용설用不用說'은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서 잘 발달하며, 그러지 못한 기관은 점점 퇴화하여 소실되어 간다는 학설이다.
'옹심이'는 보통 찹쌀가루나 수수 가루로 만든 팥죽 따위에 넣어 먹는 새알만한 덩이로 '새알심'의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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