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도서관 / 전윤호
저 숲을 이룬 아파트들
손보다 높이 올라간 서가들
창마다 불이 켜진 무덤들
어차피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색인표 하나씩 둘러쓴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
내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도 모자라지
월세 올리러 온 노인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퀴퀴한 침묵이 내리누르는
망자들의 열람실에서
눈에 불을 켜고 무덤을 뒤지는 도굴범들
빌릴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집들
은행이 말한다
당신은 연체 중입니다
대출 금지입니다
*출처: 전윤호 시집 『밤은 깊고 바다로 가는 길은』, 걷는사람, 2022.
*약력: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내 소유의 아파트라지만 원금 상환과 이자가 좀 연체되면,
가차 없이 압류가 들어오니 내 것이 아닌 은행 소유나 다름없다.
내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빌린 것이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은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이고,
열람실 사람들은 도굴범이나 다름없다.
도서관의 책은 대여할 수는 있지만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파트를 공공도서관으로 비유한 것은
시인만의 남다른 생각과 사상을 담아낸 독창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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