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손님 / 조경숙
육교에 매달린 햇살이
연등의 이마를 덥히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
모두 부처를 만나러 석왕사로 갔을까
가까운 산이 들썩이고 거리는 한산하다
부천세무서 사거리 쭈홍반점
식탁에 앉아 있는 파리 한 마리
파리로 태어난 죄 싹싹 빌고 있다
파리채를 들었다 놓는다
오늘은 너도 손님이고 나도 부처다
*출처: 조경숙 시집 『절벽의 귀』, 북인, 2014.
*약력: 강원 영월 출생, 제23회 인천시민문예대전 시 부문 대상 수상, 2013년 계간 『시와정신』 신인상으로 등단.
중국음식점인 쭈홍반점 주인인 화자는 부처님 오신 날이라 그런지 파리만 날리듯 빈 식탁에 앉아 있다.
순간 파리 한 마리가 식탁으로 날아와 "파리로 태어난 죄를 싹싹 빌고 있다"
화자는 파리채로 잡으려다가 그만 부처님 오신 날임을 의식한다.
그래, 부처님 오신 날만큼은 "너도 손님이고 나도 부처다"
그러니 어찌 미물이라도 살생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되레 부처가 되어 파리를 손님으로 맞이하기까지 한다.
부처님 앞에서 기도하다가 목에 달라붙은 모기를 때려잡았다는 얘기와는 대조적이다.
시가 어려워서 잘 읽히지 않는 요즘에 이 시는 사변적이지 않고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각으로 묘사해 읽는 이에게 의미전달이 명확하다는 것이 인상 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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