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패 / 박이화
화투라면
꾼 중의 꾼이었던 나도
다 늦게 배운 고도리 판에서는
판판이 깨어지고 박살납니다
육백시절의
그 울긋불긋한 꽃놀이 패를
(그러나! 고도리 판에서는 만년 똥 패를)
미련 없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저 한물간 낭만주의에 젖어
이 시대의 영악한 포스트모던에 영합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도 움직인다는 016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아날로그 주제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생애도
버리지 못하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젖은 꽁초처럼 미련 없이 던져야 하는 데도
도무지 홍도의 순정으로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이상 히든 패가 아닌 세상
잊어야 하는 데도
언제 어디서나 흥얼거려지는 당신
흘러간 동숙의 노래처럼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이라면
당신은 분명
내 생애 최악의 똥 패인지 모릅니다
*출처: 박이화 시집 『그리운 연어』, 애지, 2006.
*약력: 1960년 경북의성 출생, 본명은 기향(己香), 대구가톨릭대 국어국문학과, 경운대학교 경호학과 대학원 졸업.
가끔 도박꾼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서민들의 식후 소화제이기도 한 화투에서 시인은 똥 패의 역설을 풀어놓는다.
민화투 시절은 광 하나 빼고는 세 장 모두 쓸모없는 쭉정이라 그야 말로 쓸모없는 똥이었다.
그러다가 고도리 시절이 와서는 광 없이 똥 피만 들어와도 죽지 않기 때문에 신분이 대폭 상승하였다.
그렇게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했어도
아직도 동숙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민화투의 똥 패를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패를 물릴 수도 바꿀 수도 없으니 말이다.
'빛나는세상 > 출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각별한 사람 / 김명인 (0) | 2023.06.20 |
---|---|
초승달 / 안규례 (0) | 2023.06.19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심순덕 (0) | 2023.06.17 |
목마르다 / 구재기 (0) | 2023.06.16 |
밤꽃 / 나석중 (6) | 2023.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