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술값은 내가 냈으니 / 권상진

믈헐다 2023. 6. 28. 04:56

술값은 내가 냈으니 / 권상진

 

​일주일에 여섯 번 그는 술을 마시고

나는 몇 줄의 시를 적는다

고작 카톡 메시지나 식당 메뉴판 정도가

하루에 읽는 활자의 전부였지만

그는 술을 마시면 시를 뱉었다

은유에 가두지 않는 아름다운 직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기분들

삶의 늪에서 온몸으로 건져 올린 싱싱한 언어들을

선술집 구석자리에서 웃음과 눈물로 변주시킨다

 

내가 시 속에 가둔 문자들이

종일 켜놓은 모니터에 매미 허물처럼 붙어있거나

눈만 껌벅이며 뒷말을 더듬거릴 동안

빈병 너머로 흩어지던 그의 입담들

나는 길바닥에서 운 좋게 만난 동전처럼

두리번거리며 그의 말을 꾹 밟는다

몰래 주워 묻은 흙을 털어내고

말더듬이 문장 뒤에 슬쩍 끼워 넣는다

술값은 내가 냈으니 표절은 아니다

 

*출처: 권상진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 걷는사람, 2023.

*약력: 1972년 경북 경주 출생, 2013 전태일 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 시작.

 

(한겨레, 표절이냐 아니냐…판단이 왜 어려울까 [유레카], 2023.5.15.)

 

시적 언어는 꼭 시를 통해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술자리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들 속에서도 보석같이 반짝이는 시적 언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얼른 낚아채어야 한다.

시인은 그것을 가져와 자신의 문장 뒤에 슬쩍 끼워 넣고

"술값은 내가 냈으니 표절은 아니다"라며 엇셈치는 것이 밉상스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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