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한 판 / 고영민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짧은 침묵)
계란 한 판.……(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출처: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 2005.
*약력: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계란이 왔어요~ 계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계란 장수의 확성기 소리이다.
시인은 무심코 흘려버렸을법한 계란 장수의 외침에서 생의 리듬을 발견한다.
계란 장수가 만들어낸 저 리듬에는 특유의 마력이 있어서 듣는 사람의 귓불을 잡아당긴다.
한창 시를 쓰려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확성기의 외침은 분명 소음일 것이나,
시인의 귀에 들리는 계란 장수의 외침은 좀 남달랐던 모양이다.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는 시인의 말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시인에게는 음악처럼, 그것도 내공이 담긴 리듬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시라고 하면 뭔가 고상하고 멋진,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소소한 삶의 모습이 담긴 것이야말로 좋은 시의 재료가 된다.
확성기의 소음에서 계란 장수의 내공을 읽어내는 것이 바로 시인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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