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 이정록

믈헐다 2023. 7. 11. 05:19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 이정록

 

백 대쯤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젖은 해가 두 덩이

오래도록 식식거리는

저물녘의 수렁논

 

*출처: 이정록 시집 의자, 문학과지성사, 2006.

*약력: 1964년 충남 홍성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교사 재직.

 

 

암소와 노인이 수렁논을 매고 있는 풍경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쟁기를 끌다 말고 암소는 수렁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우뚝 선다.

암소는 짐짓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노인에게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준다.

그런데 암소의 눈에 들어오는 건 “저를 후려 팬 노인의 /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암소는 자신의 늙음과 함께 더 늙은 노인을 보았으리라.

 

*참고

수렁논은 곤죽이 된 진흙과 개흙이 물에 섞인 논을 말함이다.

동녘, 서녘, 남녘, 북녘 새벽녘, 샐녘, 저물녘, 어슬녘, 저녁녘은 한 단어이다.

동틀, 아침, 황혼 , 은 한 단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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