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서방 길들이기 -나팔꽃 / 김양숙
애초부터 더듬이가 긴 건 아니었어요
내 놓을 것 하나 없는 몸뚱아리 지탱하려고
허방다리 짚다 수없이 넘어지고
꼿꼿한 기둥하나 걸리기만 해라 아침마다 되뇌이다
길가에 서있는 당신을 처음 만났지요
당신은 걸어서 오라고 했지만
나는 기어서 갔지요
한 발 한 발 허공에 늘인 줄을 따라
집 한 채 들이고 세간을 풀었지요
행간에 창을 내고
한 땀 한 땀 문패를 새겼지요
새벽이면 피멍든 이슬
창 아래로 쏟아 내며 내민 촉수
당신의 허리를 친친 감았지요
몸을 뒤틀어야 피어나는 꽃
나중에 알았지요
당신에게 나를 묶는 일이 한나절이면 지고 마는
보라색 교태를 흘리는 일이란 걸
*출처: 김양숙 시집 『기둥서방 길들이기』, 나무아래서, 2013.
*약력: 제주 출생, 1990년 '문학과 의식' 시 부분에 등단하여 문단 활동 시작. 서울 시인상 수상.
시제는 “기둥서방 길들이기”이지만 실상은 부제인 “나팔꽃”의 독백이다.
스스로 “내 놓을 것 하나 없는 몸뚱아리 지탱하”기 위해 여기저기 더듬다
헛수고만 하고는 내심 “꼿꼿한 기둥하나 걸리기만 해라”며 기회를 엿보았단다.
그러나 아침이면 피었다가 한나절이면 지고 마는 나팔꽃의 처지가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느 나약한 여인의 하소연으로 들리지 않은가.
자신의 기둥인 줄 알고 열심히 친친 감아올리고 세간 다 갖추고 살림을 차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나절 피고 마는 신세였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참고
‘몸뚱아리’는 ‘몸뚱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인 ‘몸뚱어리’가 바른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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