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로 쓰는 시 / 서안나
어느 시인이 말했었다
시는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고
머리도 손가락도 아니라
책상 앞에 눌어붙어서
엉덩이 힘으로 쓰는 것이라고
오랜만에 들른
시골 친구 집 마당 한 귀퉁이
늙은 호박이 땅에 엉덩이를 대고
퍼런 잎사귀와 줄기로
여름을 기어와
누렇게 금 딱지 처럼 제 몸을 익히는
엉덩이 힘으로 쓰는
한여름 펄펄 끓는 뜨거운 경전의 독경소리
엉덩이로 쓰는 시는 단단하다
친구가 호박죽 끓여 먹으라고
껍질을 벗겨주는 늙은 호박엔
칼도 들지 않는다
*출처: 계간 《문학선》 2005 하반기호.
*약력: 1965년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 1990년《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엉덩이로 쓰는 시’와 ‘늙은 호박’의 연관성은 무얼까.
“책상 앞에 눌어붙어서 / 엉덩이 힘으로 쓰는” 시와
“칼도 들지 않는” 늙은 호박”은 단단하다는 것이다.
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속은 보잘것없는 물건이나 사람,
씨가 여물지 아니한 늙은 호박을 ‘굴퉁이’라고 한다.
자고로 사람이든 호박이든 시이든 여물어야 제맛이 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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